오니즈카 히데아키(鬼塚英昭)의 저서「천황의 로사리오(天皇のロザリオ)」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천주교를 믿는 지방 영주들이 전쟁에 필요한 화약을 수급하기 위하여 자기 영지의 여자들을 서양선박에 짐승처럼 묶어 가득 팔아치웠는데, 그 여자들은 울며불며 소리치고 선박의 서양인 부들은 그들을 함부로 다루니 그 참담함이 지옥에 비견할 지경이다. 그 이외의 유럽에 관한 기록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는 곳마다 일본 여성이 많이 눈에 띈다. 유럽 전역을 통틀어 무려 50만이라고 한다. 백인들에 의해 일본인 여성들이 놀이감으로 전락한 모습을 좌시할 수 없다. 서양의 대포 등을 수입하기 위해 자국민을 저 먼 땅에 팔아치우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왜 같은 인간을 노예로 삼는가. 포르투갈 교회의 선교사들이 초석(화약의 원료)과 맞바꾸어 젊은 처자들을 인도나 아프리카에 팔아치우고 있다. 사극에서도 다카야마 우콘 등의 크리스찬 영주들이 나오지만, 그런 크리스찬 영주들이 화약을 얻기 위해 화약 한 통 당 일본인 여성 50명을 팔아치운 일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칼럼: 중세 노예무역 시대의 일본인 노예 Column: Japanese Slaves in the Age of the Middle Passage
16세기 후반에는, 포르투갈 본국이나 남미 아르헨티나에까지 일본인 노예가 팔려나갔고, 1582년 로마에 파견된 일본의 소년 사절단 일행도, 세계 각지에서 많은 일본인이 노예 신분으로 지내고 있는 사실을 목격하곤 경악한 바 있다.
「우리 일행 앞으로 지나간 일본인 노예들을 가까이서 보았을 때, 이런 싼 값에 가축처럼 팔려온 일본인들을 나몰라라 하는 우리 민족에 대한 격렬한 증오가 끓어올랐다」
「당장 우리 곁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남녀와 어린 소년 소녀들이 전 세계에 이렇게 싼 값에 팔려와 비참한 모습으로 험한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며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큐슈 지역에서의 히데요시의 행적을 기록한 책인 큐슈 어동 좌기(九州御動座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서양인 선교사들은 백성들의 종교를 자신들의 사이비 종교로 끌어들임은 물론, 수백명의 일본인들을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들여 자신들의 배에 태워 싣고 가서 해외에 팔아치운다. 그들은 일본인 노예들의 손발에 철제 쇠사슬을 묶은 후 가득 몰아넣고 산 채로 가죽을 벗겨내는 등 지옥의 고통보다 더한 축생도를 펼치고 있다」
일본의 노예제와 포르투갈의 노예제 당시의 일본에는 서양처럼 공인된 노예제도는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노예로 삼을 만한 대상이 극단적으로 적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사람을 사고 파는 경우는 일반적으로「(먹고 살기 힘든) 부모가 아이를 판다」경우가 압도적입니다. 당시의 일본은 신분제도 상 양민(백성)과 천민이 있었는데, 통상적으로 인신매매는 금지되고 있었습니다만 천민은 암암리에 인신매매가 이뤄지고 있었고, 기근이나 경제위기가 발생할 때는 인신매매가 묵인되곤 했습니다. 헤이안 시대부터는 아예「인신매매 상인」이 횡행합니다. 도시의 젊은이들을 납치하여 지방 변경에 팔아치우는 것이었습니다. 변경은 아직 개발이 덜 되었던만큼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인신매매 상인이 젊은이들을 납치하여 팔아치우는 행태가 빈번했습니다. 그런데도 포르투갈이 일본에서 노예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포르투갈이 일본인 노예를 얻기 위해 일본에서 초석을 많이 사들여 갔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이 초석을 사들이게 되면 일본은 화약을 수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포르투갈에게 노예를 제공하는 것으로 초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개요에 기반하여, 지방 영주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화약과 군사 기술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영지 내의 일본인들을 서양 선박에 팔아 넘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인들은 그 후 서양에서 노예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런 노예무역이 중세 시대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됩니다.